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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14. <부정공>학생공휘몽현행장(學生公諱夢鉉行狀)
1. 문헌 목록 〉21. 21世 〉16. <부정공>남천공휘희규가장(南川公諱憙奎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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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부정공>송촌공휘민규가장(松村公諱敏奎家狀)
松村公諱敏奎家狀祔戒二子鍾華鍾哲書 公諱敏奎字雲擧初諱鵬逵松村其號也累世狀德己具不更煩高祖諱器夏受業于尹屛溪金渼湖兩先生學識德行爲世推重傍孫寅錫撰碣銘曾祖諱聖淳孝友著稱祖諱載根親劑吮嘗考諱麒燁早襲庭訓克繼家聲妣慶州李氏東粲禁女幽閑貞靜配德無違府君生于 純祖甲戌十二月二十九日天性清白明敏通達事理見重於士友年纔弱冠先考務本公有干于官未曾如期還之官奴輩來而出言不恭府君讀書侍側乃厲聲叱枕矣其後務本公往城中留焉該吏請間務本公自思曰此非曩日之報歟雖然彼焉敢浼我乃隨而往之則厚待酒案曰敢賀生員宅之有賢子也小等擧行多年未見如此人物將來成就其可量乎其見慕有如此又同里某家爲獵者所侵破壤家產相爭不決訴于府君府君剖判如流其徒素聞高風不敢欺情出金相和其見重有如此又鄉中素多賭博一時追逐者皆以此連絡從風而靡惟府君行步出入未嘗目秋毫無犯時人目之曰趙公來則酒案撤矣其制行有如此也又爲宗議所推受相好先亭記文於蘆沙奇先生叙禮巳畢以着山要旨相與討論先生欣然如舊而題之盖公素習堪輿故也自是以後間間遊從其師友淵源有如此也又未占態夢之故以再從兄憙奎子鍾華爲子而晚卜金氏育一男鍾哲是以著遺戒一章以授二子以示丁寧曉告之意上慮宗祀之萬全下備後承之無他議其深慮有如此又母后一麓本以本面所有矣鄕綱陵弛互相吞幷紛爭不息府君時在其任屢度聞官成立宗文至今坊民皆蒙其澤矣丙子十一月有微羔一日乃易潔衣少無恒化意淹然而逝乃二日夜羊也壽六十三葬于鳳田村右酉坐原配孺人慶州鄭氏煥謙女庚午生丁卯十一月八日卒墓同崗水別嶝酉坐原莊淑閑雅只育一女適慶州鄭任奎孫曰縯永潘南朴岐陽妻餘不盡述嗚呼不肖獲侍家庭略聞言行動靜之節而見識蔑劣不能發揮其萬一只叙梗槩以竢後之作者 曾孫 東勳 撰 余以宗孫年老無嗣上告 祖宗之靈下通一門之議取再從姪鍾華以嗣後事巳有多年矣汝則善繼祖宗香火善保稚弟可也次子善承汝兄之敎更無異議吾意巳決宗議亦同切勿生意善善保宗可也雖百世之後實體今日之深慮以此遵行焉若有異心則決非吾子孫也戒之戒之餘不多及丙子十月晦日老父敏奎書手印 송촌공휘민규가장(松村公諱敏奎家狀) 공의 휘는 민규요、 자는 운거(雲擧)며、 초휘는 붕규(鵬逵)고、 송촌은 호인데 여러 대의 장덕은 이미 갖추었음으로 다시 기록하지 아니한다。 고조 휘 기하(器夏)는、 윤 병계(尹屛溪)와 김 미호(金渼湖) 두 선생에게서 수업하여 학식과 덕행이 세상에서 추중한 바 되었고、 방손 인석은 갈명을 찬하였다。 증조 휘 성순(聖淳)은 효행으로 저명하고、 조 휘 재근(載根)은 어버이 병환에 종기를 빨고 똥을 맛보았으며、 고 휘 기엽(麒燁)은 일찌기 정훈을 이어받아 선세의 성문을 이었다。 비는 경주 이씨(慶州李氏) 동찬(東粲)의 따님으로 그윽하고 한아하며 곧고 조용하여 부덕이 어김이 없었다。 순조(純祖) 갑술년(甲戌年一八一四) 十二월 二十九일에 부군이 출생하였는데、 천성이 청백하고 명석하여 사리에 통달하니 사우가 다 충중하였다。 나이 겨우 二十세 때、 선고 무본공이 관가에 일이 있어 그 기간 동안 돌려 보내지 않자、 관노의 무리들이 언사가 공순하지 못하자 부군이 곁에 모시고 있으며 글을 읽다가 성난 목소리로 꾸짖으며 장격하였다。 그 뒤에 무본공이 성중에 들어가 유숙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 아전이 와서 뵙기를 청하였다。 무본공이 생각하되、 『이것은 전일의 가품이 아닐까、 그러나 제 어찌 감히 나를 능멸하리요。』 하고 따라가니 주효를 후하게 차려놓고 대접하며 말하기를、 『감히 생원님이 어진 아들 둔 것을 하례합니다。 소인배가 거행한지 여러 해에 이와 같은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으니 장래에 성취를 가히 헤아리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보고 사모한 것이 이와 같았다。 또한 마을의 어떤 사람 집에 사냥하다가 침노한 바 되어 가산을 파괴하고 서로 다투고 해결치 못하다가 부군에게 하소연함으로 부군이 쪼개서 판결을 여류하게 하니 그 무리가 본래 높은 풍성을 들은지라 감히 뜻을 속이지 못하고 돈을 변상하며 화해를 청하였다。 고을에 도박이 성행하여 한때 추축한 자 다 이로서 연락하여 바람을 쫓아 합류하되 오직 부군은 출입하실 때에 눈을 떠보지 않으시고 추호도 휩쓸리지 않으시니、 당시 사람이 지목하되 『조공이 오시면 술자리가 없어진다。』 하였으니 그 엄정 고결함이 이와 같으시었다。 또 종중 부탁을 받아 상호선정기문을 기 노사(奇蘆沙)선생께 청문하러 가서 수인사 한 뒤에 삼보는 요지로서 서로 더불어 토론하니 선생이 구면같이 혼연히 써 주시었으니 대개 공이 본시 지리서를 습득한 때문이었다。 이 뒤로부터 간간이 종유하시었으니 그 사우 연원을 가히 추앙하겠도다。 후사가 없어 재종형 희규(憙奎)의 아들 종화(鍾華)를 양자로 삼고 말년에 김씨를 얻어 일남 종철을 생육하니 이로서 유계 한 장을 밝혀 두 아들을 주어 정녕히 효우한 뜻을 보아온 것은 위로는 종사의 안전을 염려하고 아래로는 후손의 틈이 없도록 대비한 것이니 그 깊은 자손지계를 가히 숭앙하겠도다。 또 모후산(母后山) 기슭이 본시 본면 소유인데 향강이 능이하여 서로 탄병함으로 분쟁이 그치지 아니한데 부군이 그때에 임직에 있는지라 여러번 관부에 소청하여 완문을 성립하니 지금까지 고을 백성이 다 그 혜택을 입었다。 병자년(丙子年) 十一월에 신양이 있어 하루는 깨끗한 옷을 갈아 입고 조금도 슬픈 빛이 없이 향년 六十三세로 의연이 서거하사니 초이튿날 밤중이었다。 봉전촌우 유좌원에 안장하였고、 부인은 경주정씨(慶州鄭氏) 환겸(煥謙)의 딸인데 경오년(庚午年)생으로 정묘년(丁卯年) 十一월 八일에 졸하니 묘소는 같은산 등성이 수별등유좌원(同崗水別嶝酉坐原)이었다。 씩씩하고 어질며 한아하였으나 다만 딸 하나만을 생육하여 경주(慶州) 정임규(鄭任奎)에게 출가하였으며、 손자는 인영(縯永)이고、 손녀는 반남(潘南) 박기양(朴岐陽)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불초가 가정에 모시고 말과 행실 동정의 절차를 들었으나 견식이 졸렬하여 능히 그만에 하나도 발휘하지 못하고 다만 대강을 서술하여 후일의 작자를 기다린다。 증손(曾孫) 동훈(東勳) 삼가 지음 내가 종손으로 나이는 늙고 후사가 없어 위로는 선조의 정령에 고하고 아래로는 일문의 의론들 거두어 재종질 종화를 데려다 후사를 삼은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너는 조종의 향화를 착실하게 계승하고 어린 아우를 잘 모호하여라。 차차는 네 형의 가르침을 준수하여 착실히 이행하고 다시 이의가 없을 지니라。 내 뜻이 이미 결정되고 문의가 또한 같으니 절대 다른 생각을 품지 말고 비록 백세 뒤라도 오늘의 대계를 깊이 채득하여 준행할 지니라。 만일 다른 마음을 품으면 결코 자손이 아니니 엄히 경계하고 여러 말을 아니하노라。 병자년(丙子年) 十월 그믐 노부(老父) 민규(敏奎)는 써서 수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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